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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1-

삼국지 2009. 9. 24. 16:14

저명한 중국 역사학자 10인이 만장일치로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동아시아의 최대 영웅으로 꼽았다는 조조.

그러나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실사구시에 입각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가장 많은 욕을 먹은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업적이 가려지고 왜곡되었다. 1950년대부터 꾸준히 복권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학계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에게는

여전히 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는 또 역행이 지나쳐 조조 숭배자라고 불릴만한 이들은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고 있으니,

부뚜막에 왜 연기가 나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현재의 우리가 근 2천년 전의 이야기들을 세세하게 복원할 수는 없지만, 아마추어라는 이름을 방패삼아

상상력을 마구 동원하여 결과물들을 역추적하여 복원해가는 과정은 나름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가장 극적인 왜곡의 걸작 중 하나는 여백사와 진궁에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정사에는 여백사는 물론 진궁도 따로 열전이 없이 무제기(조조전), 여포전 등에 편린된 기록으로 나타날 뿐인데

연의에서는 제법 거하게 등장하여 한을 향한 충신으로 분류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보자.



1. 정사의 기록에서는 동탁이 실권을 잡은 뒤 조조가 귀향하는 장면에서 분명 중모현에서 붙들린 적이 있다.

2. 정장(=우리나라 개념으로 사또)이 조조를 의심하여 사로잡아 현성까지 압송했으나 조조를 알아본 이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3. 진궁의 효심이 깊다는 것은 정사의 기록에서 죽기 직전 노모를 조조에게 부탁하는 짤막한 대목이 나와 알 수 있다.

4. 장막은 원래 원소, 조조와 친분이 깊었으며 두 사람 모두 장막의 능력과 인품을 인정하고 교유한 친우 사이였다.

5. 여백사는 기록이 없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 시도하고 실패하여 도주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석연찮은 부분이 굉장히 많다.

우선 암살을 하는데 웬 보도가 필요하단 말인가? 당시 농민군은 무기와 갑주가 변변찮고 반란을 두려워한 지휘관에 의해

날카롭게 벼려지지 않은 무기들이 주어졌기에 그런 것들로는 당연히 사람을 일격에 죽이거나 할 수는 없었으나

장수급들은 달랐다. 그들은 당연히 전투를 지배해야하기에 늘상 무기에 신경쓰고 날카로움을 유지했다.

요약하자면 조조는 자신이 가진 무기만으로도 만약 하려고 했으면 큰 문제가 없었으며, 반드시 보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조조가 칼을 빼들고 다가가다가 거울에 반사된 빛 때문에 걸렸다고 한다. 개그였을까?)


게다가 연의에서는 조조가 동탁의 곁까지 칼을 차고 갈 수 있었다고 하지만 동탁이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사실로 받아들여야할지 의문스럽다. 칼을 차고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숨기기 좋은 단검을

선택해야 마땅했으리라.


정사에도 기록이 없고, 앞뒤도 잘 안맞는 이런 소설적 설정에 의거하여 암살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조조가 굳이 중모현에서 붙들릴 만한 짓은 하지 않았음에도 정장의 의심을 사 붙들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마 첩자나 범죄자(살인자, 산적 등)로 오인받은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1, 2번을 합하여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으니 누군가를 집어넣기엔 좋은 설정이다.



3번에서 우리는 민중의 공분이나 동감대 형성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나관중은 그간 널리 퍼져있던 삼국지의 이야기를 취사종합한 것이 대부분의 작업이었지만,

그의 시대에 씌여졌건 그 이전에 형성된 이야기건 충과 효는 늘 최대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효자를 충신으로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이 모든 조작에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4번과 조조의 인품이다.

장막은 조조가 기반이 잡히기 전에 이미 태수직에 있었고 조조가 힘들어할 때 옆에서 원조했으며 서주에서 도겸과

힘겨운 전투를 치를 때에도 그 후방을 맡아준 신의 넘치는 인물이다.

정사에서는 서주로 1차 출격했던 조조가 회군한 후 장막과 재회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까지 있다.

연주 지방의 실권을 잡고 있던 조조의 배후를 가장 넓게 맡아주고 있던 인물이 장막인데,

이런 인물이 단순히 원소, 조조, 장막 사이의 불화가 생긴 틈에 여포가 도착하고 진궁이 충동질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다.

연의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없이 장막의 인물됨이 축소되어 있어 지금 이러한 설명을 들은 직후에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음을 느낄 것이다.

결과는 이미 나와있듯, 조조 세력권의 대부분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장막이 일으킨 반란인 만큼 여포와 진궁이 지휘하지 않았어도

조조 세력권은 거덜났겠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려면, 뭔가 적당한 대의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장막 본인에게는 그럴듯한 이유 - 그러니까

"원래부터 신의가 떨어지는 인물이었다"는 식의 설정을 붙여줄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곳을 손봐야했던 게 아닐까.

관계된 자가 사악하여 내 손으로 치겠다는 식의 명분은 그럴듯하다. 반대편에 선 조조는 악역을 맡을 수밖에.

그래서 진궁은 정사에서의 첫 등장이 장막 휘하에서 식객으로 있다가 조조를 배신하는 장면이지만,

연의에서는 조금 땡겨진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충신' 진궁이 조조를 까려면, 깔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을 연의에서는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키는 것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이상한 점이 한두개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여백사가 존재했다고 가정해보자.

조조는 낙양의 변화를 감지하자마자 부친 조숭을 고향으로 내려보내고 나중에 연주에 기반을 잡은 뒤에도

다시 부친을 자신의 근거지로 옮겨오게 하며(서주에서 죽었지만) 어딘가를 원정할 때도 배후를 단단하게 하고 떠났다.

그런 그가 조숭과 각별한 사이라는 여백사를 그런 길목(?)에 내버려두었을까?

설령 조조가 챙기지 못해서 그 동네(?)에서 그대로 살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의심이 많은 조조였다면 차라리 아예 들르지 않고

피해가는 식으로 우환거리를 애초에 만들지 않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게다가 붙잡혔다 풀려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은가?)

일부러 여백사에게 들러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에 의심을 불러오게 하고 또 그것을 의심하고 참사를 일으켰다는

설명은 조조 같은 지략가에게 별로 어울리는 처신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그렇게 의심 많은 조조가 다음 마을에서는 쿨쿨 잘 잤다고 한다)

초기의 기록에서 조조는 호탕하고 자유분방하여 사람 사귀기를 즐겨했으며 온갖 망나니 짓을 하고 다녔다고 기록하는데,

정치판에서 점차 의심덩어리가 커져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종국에는 의심덩어리가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쳤으니 초반부터 그러지 않았겠느냐 라는 설정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 같다.





다음에 계속...

Posted by OOJJ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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