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9.11.27 전체 개요
  2. 2009.11.27 작업일지 09.11.27.금.
  3. 2009.11.17 삼국지 -열전- 2
  4. 2009.10.05 후한 말기의 관제 -1-
  5. 2009.09.30 삼국지의 무기편 -1-
  6. 2009.09.24 조조 -1-
  7. 2009.09.23 도량형(척, 장, 근)에 대한 오해

삼국지 -열전- 은 한 마디로 잡탕 게임이다. 많은 게임의 내용이 뒤섞여 있으며 시뮬레이션의 성격이 강하다.

턴 방식 진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실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 하다.

기획 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바로 '현실성'이다. 플레이어와 게임 세계를 동화시켜 현실감 있는 배경이 되게끔 여러 장치를 두어 노력했다.



1. 진행 방식

싱글/멀티 플레이가 가능하며 장수 플레이를 기본으로 한다. 각종 장르의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에 가장 비슷한 장르를

고르라고 한다면 MMORPG 삼국지를 울티마 온라인처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1턴은 전략 턴(30초~무제한) / 실행 턴(2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전략 턴에 장수의 행동을 정하고 실행 턴이 되면

동시에 결과가 진행된다. 삼국지6의 그것과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좀 더 확장되어 있다.

실행 턴에는 모든 플레이어(컴퓨터 포함)의 행동이 종료되면 2분을 다 채우지 않더라도 자동 종료된다.

물론 군주나 태수처럼 지휘권을 가진 장수는 다른 장수에게도 임무를 명령할 수 있는데 기존 시리즈처럼 수행하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글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다.

또한 1인칭 시점 개념이 도입되어 플레이어가 군주라고 해도 모든 것을 제어할 수는 없다. 심지어 전투에 출전해도 자신의 부대가 아니면 직접 조종할 수 없다!(간접 조종은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지 열전은 필연적으로 좋은 인공지능을 갖추어야 했으며 플레이어의 의도를 각 말단부(?)까지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다.



2. 게임 종료 조건

각 지위에 따른 승리 조건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패배 조건 또한 다양하고 플레이 장수가 죽으면 기존 시리즈처럼

다른 장수를 선택하여 연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끝나게 된다. 이는 나중에 설정을 두어 조절할 수 있게 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3. 멀티 플레이

멀티 플레이를 할 때는 장수의 이름과 이미지만을 선택하고 랜덤한 능력치로 시작하는(타입은 결정할 수 있다) 랜덤 플레이를 지원한다.

삼국지 열전은 장수의 능력치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에디터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누가 얼마만큼의 능력치인지 알지 못하므로

랜덤 장수의 시작은 그 특성의 극대화가 된다. 물론 밸런스 파괴 같은 것은 없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능력치 차이를 대처할 수 있으므로

관건은 자신의 능력 파악과 가능한 승리 조건을 노리는 전략적 감각이다.



4. 현실성 장치

모든 장수는 어떠한 '판단 기준'을 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관우는 병사 훈련도에 대해 보병80, 극병40, 창병40의 기준 수치를 갖고 있고 장비는 보병70, 극병40, 창병90의 수치를 갖고 있다.
(실제 수치와는 같지 않고 그냥 예제일 뿐이다)

어떤 병사(또는 부대)의 훈련도가 보병75, 극병50, 창병50이라고 해보자.

이때 관우를 플레이하는 유저가 볼 때 그 대상은 보병 B급, 극병 A급, 창병 A급으로 나올 것이고
 
장비를 플레이하는 유저에게는 보병 A급, 극병 A급, 창병 C급으로 보일 것이다.

만약 관우와 장비가 AI라면, 군주인 유저에게 "진언"을 할 때 저 판단을 참고하므로 아마 둘의 의견은 엇갈리게 제시될 것이다.

당연히 관우는 보병 훈련이 더 필요하다고 할 것이고 장비는 창병 훈련이 더 필요하다고 할 것이므로 판단은 알아서...

물론 저 내재된 판단 기준은 공개된 수치가 아니므로 누가 어떤 수치가 더 높은지는 알 도리가 없다.

만약 군주인 유비가 관우처럼 보병80, 극병40, 창병40의 기준을 갖고 있다면, 아마 장비보다는 관우 말을 뽑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는가?

유비가 플레이어라도 자기 눈에도 관우처럼 보일테니 말이다.


이런 장치를 보조하는 것이 바로 "평가" 제도다. 평소 유비는 관우를 "보병A, 극병B, 창병B"로, 장비를 "보병A, 극병B, 창병A"로 평가했다고 하자.

그럼 이때 유비는 위의 정보에 기초하여 창병 훈련이 부족하다고 진언하는 장비 말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이 평가도 실제 수치와는 무관하고 어떤 장수 A가 B를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하는 말에 불과하다.

만약 자부심이 높은 장수라면 자신의 능력을 실제보다 더 높게 평가할 것이고 사이가 나쁜 장수가 있다면 그놈의 능력을

더 까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장수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장수라면

자신의 감정에 따라 다른 장수를 깎아내리는 일은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즉, 결론적으로 유저는 현실의 우리처럼 장수의 내부 수치가 아니라 "각 장수들이 지각한 내용"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또 다음 기회에 올리도록 하겠다.

Posted by OOJJRS
,

게임 제작이란 원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작업이 훨씬 많다보니 그 동안 작업 진척도란 것을 올릴 수가 없었다.

물론 작업을 시작한지도 1년이 훌쩍 넘어섰는데 이것밖에 못한 것은 게으름의 영향도 있다 하겠다.


볼품 없는 성 그래픽에는 일단 참아주시라. 기존 삼국지에서 따다 쓸까도 고려했지만 도대체 저 시점에 맞는 성 그래픽이

5~11 시리즈를 통틀어 한개도 없다니!
(물론 도스 버전은 아예 논외로 했다)


아직 배경 지도로 사용되는 위성 지도 또한 대충 갖다 넣어둔 것일 뿐, 강을 강조하거나 주 구분선, 지형도 같은 것들의

작업은 왠지 요원해보인다.

마찬가지로 저 성들의 위치도 아직 측정이 덜 끝나서 일단 급한대로 10개만 먼저 집어넣은 것이다.
(평원이 가려서 안 보이는데 왜 10개라고 뻥 치냐고 하지 말자)



삼국지 열전에서 성이란 시나리오마다 자유도가 부여된다. 등장 여부가 결정될 뿐 아니라 위치 또한 저대로 사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나리오 에디터는 기본적으로 입력된 수십 개의 성의 기본 위치 정보를 갖고 있지만 제작자에 따라서는 아예 딴판의

위치를 사용하거나, 혹은 삼국지에 등장하지 않았던 조그마한 '현'을 만들어 사용할지도 모른다.

시나리오 제작자는 "기본 성 위치 사용하기"를 통해 먼저 지도 위에 성을 깔고 그것을 수정하든지, 자신의 데이터를 갖고 새로

만들든지 할 수 있다.



고민 중에 있는 사실은 게임 진행 중의 성 변동 자율도다. 실제로 삼국지 역사에 기록된 사건만 하더라도 낙양과 신야성이

아예 폐허가 되었으며 백성들을 몽땅 옮겨서 폐허가 된 성들도 후삼국 시대에 몇 존재한다.

때문에 아예 성을 없애거나 새로 만드는 기능을 넣을지 말지 고민중이다.




현재 명령들은 20% 정도 완성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작업 중이긴 하지만 오늘을 끝으로 한동안 잠수를 탈 것 같다.
Posted by OOJJRS
,
삼국지 열전을 제작하기 위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AI 계의 발전에 일조

2. 현실적인 배경 및 일본 문화 탈피(일본식 왜곡/재해석, 문화 흡수 지양), 한국 정서에 맞는 한국식 삼국지 문화 형성

단순하게는 서로를 부르는 호칭 같은 대화의 문화에서부터 넓게는 의도적인 역사적 왜곡이나 일본식의 사건 해석 등을 벗어난 한국형 삼국지 게임 제작

3. 다형성(?) 플레이를 제작해보고 싶은 욕구

다양한, 여러 방식을 동시에 조합한 멀티 플레이 지향. 즉 2명이 한 컴퓨터로, 나머지 한 명은 네트워크로 3인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는 방식 등을 지원하고픈 욕심

4. 편리한 UX 제공

5. 높은 수준의 창조적 유저 생산성을 통한 순환 시스템 제작 욕구

게임에서 제공하는 모든 내용을 유저가 동일하게 에디터를 사용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 제공. 원한다면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제공할 수도 있고 반드시 삼국지 시대가 배경이 아닌 다른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는 그런 자유성



삼국지 열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매니지먼트

직접 장수로 성과를 올리는 것이 아닌, 관계와 정책을 통한 관리형 게임

2. 높은 AI

현실이라면 당연히 이래야지? 와 같은 직관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세계의 움직임 구현

※ 개별 대화체 시스템, 정보 수집 결정 시스템, 정보 판단 시스템, 관계 시스템(기획 중), 의사결정 시스템 등

3. 동시 전략, 동시 수행

삼국지6 과 비슷하게, 전략/수행/보고 페이즈로 나뉘어 동시에 현재 상황에서 전략을 상정하고, 동시에 수행하며 결과를 보고받는 시스템

4. 내부 수치 비공개

장수A의 능력치가 내부적으로 수치가 있을지는 몰라도 플레이어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시스템. 각 장수의 능력치는 '평가 등급'으로 표현되며, 유비가 관우를 볼 때와 장비가 관우를 볼 때 무력의 '평가 등급'은 서로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뜻함. 따라서 플레이어는 여러 장수들의 간언을 보고 최종적으로 '선택 행위'를 통해 정책을 선택하는 플레잉 방식을 사용하게 됨

5. 관조자

역사 속의 위인으로는 플레이할 수 없으며(향후 기능 추가로 제공될 여지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생성하여 플레이하고 역사에 포함되는 역할.

6. 단일 조작

캐릭터의 지위가 군주라고 하여 다른 장수들의 행동까지 설정하거나 간섭할 수는 없음. 모든 명령의 실행과 그 과정은 자동으로 진행되며 다른 도시의 정치, 행위 등도 모두 자동 위임되어 있음. 오직 플레이어들만이 자신의 캐릭터를 직접 조종할 수 있음.

7. 관계/정치 시뮬레이션

여타 삼국지가 대부분 전쟁과 전투를 테마로 하는 게임이었다면 삼국지 열전은 인간 관계로 대변되는 정치 시뮬레이션. 관계 매니지먼트의 끝은 정치지만 정치가 그리 어려운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강변하는 특징.

Posted by OOJJRS
,
아마 많은 사람이 헷갈리는 내용 중 하나는 바로 후한 시대의 관직 제도가 아닌가 한다.

본시 꽤 합리적이고 정갈하게 제정되어 내려왔으나 후한의 어지러움에 이런 저런 관직이 생겨나고 없어지고 변형되면서

제법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위나라 정치계의 거장이었던 상서령 진군에 의해 발의된 구품관인법을 제정하면서
 
관직의 품계를 9개로 정하여 정리하기 전까지 꽤 문란했던 것.

지금까지의 글이 그러했듯이 기약없는 2탄을 염두에 두고 꽤 흥미가 동할 법한 내용부터 일단 살펴보자.



자사, 목, 태수, 상, 승 등은 헷갈리기 좋은 소재다. 오기도 눈에 띄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하니 대체 뭘까?

이해하기 위해선 앞선 이야기가 조금 필요하다.



주나라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후백자남이라는 귀족 체제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로 유지되었다.

주나라의 실질적인 힘이 중국 전 국토를 대상으로 할만큼 크지 못하였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곳에는 공작이나 후작을

임명하여(대개는 혈족 또는 공신에게 우선 순위가 돌아갔다) 통치권을 주는 대신 안정을 꾀하는 방법이다.

이후 진나라가 전국 통일 후 왕 위에 황제가 탄생하여 다른 귀족처럼 중간 계급으로 내려 앉았지만
 
왕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고 대개 명분 뿐이었기 때문에 공작위보다 크게 높다고 하긴 어려웠다.

어쨌든 이 작위에서 백작위 이하로는 정리되었고 공신들은 대개 후侯로 임명되고, 그 위세가 군주에 못지 않은 자들만이

공公에 임명되었다. 또한 진나라는 기존 주나라의 정치 체제 대신 군현제를 실시하여 전 국토를 관료제에 맞게 정비하였다.



한나라는 통일 제국으로서의 기반이 잘 닦인 진의 체제를 거의 수정 없이 받아들였으며 문제점이 조금 있던 군현제는

약간의 수정을 하여 받아들였다. 전한 초기 군국제가 잠깐 실시되었던 것이다.

군현제가 군과 현으로 나누는 것이라면, 군국제는 군과 국으로 나누었는데, 국과 현은 두 가지 차이가 있다.

~국國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들 국은 작은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자치 및 조세권을 인정 받았다.
 
규모 자체는 1개 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현령은 관리인 반면 이들은 왕(또는 공, 후)의 칭호를 썼고 나라의 공신 혹은 혈족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봉건제와 군현제의 병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후에 강력한 황제였던 한 무제에 의해 정리된 후에는

실질적으로 군현제와 다름없어졌으나 이름뿐인 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조조의 고향으로 나오는 패'국' 초현, 유비의 고향인 유'주' 탁현 등으로 표현된다.
(국은 대개 공작이나 후작이 받을 경우 1개 현 정도 규모였지만 왕이 받으면 1개 군 정도를 받기도 하였다)


한나라는 바로 13개 주와 수많은 국으로 이루어졌으며 13개 주州는 다시 군郡으로 나뉘었고 이 군은 여러 개의 현縣으로 구성된 것이다.


자사는 그 중 주를 통치하는 장관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하자면 도지사와 같다.

태수는 바로 군의 통치자다. 강원도지사가 자사라면 강릉시장은 태수다.

국의 통치자가 바로 상이다. 국은 원래대로라면 자사와 같은 급이어야하나 한 무제 이후 크게 약화되어 군이나 현과
비슷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개념으로 상에 해당하는 것은 광역시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그 이하로 내려와서 현의 대표로 현령 등이 있는데, 구청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한나라에서는 현 단위로
성을 쌓았기 때문에(역시 대륙의 규모랄까) 우리나라의 구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금 오류가 있지만
작위의 상하 관계를 파악하는 비유로서는 무리가 없다.



이 외에도 여러 관리가 있었는데 1개 군의 관직만 해도 태수 밑으로 도위, 승 등이 있어 도위는 군무를 담당하고 승은
태수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손견이 거쳐갔던 하비승이나 유비가 거쳤던 하밀승 같은 경우를 이제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유비가 평원군에 속한 평원현의 영이 되기 전에 거쳤던 하밀승 또는 고당위 작위는 하밀현의 승, 고당현의 위로
승은 정무 담당, 위는 군무 담당이며 같은 급이다)



주목은 원래 없던 관직이었으나 후한 영제 때 각지에 황건적이 일고 혼란이 일어나자 1개 군의 태수 힘으로는 군사력을

행사하기 어려워 주자사에게 군사 권한을 주어 각 태수가 지닌 군사력을 통솔하게 했는데 그것이 주목이다.

원래로는 굉장히 위험한 짓이지만 후한 말기는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혼란했고 이로 인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지방 호족이나 지방 관리들이 관군의 이름으로 자신의 힘을 기르기에 용이해졌다.

기주 자사 한복으로부터 기주를 취한 원소가 기주 자사 대신 기주목으로 불리고 죽은 연주 자사 유대 대신
(한복이 기주목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어 오기인지 군사권을 받고 온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연주를 취하고 있던 조조가 연주목 등으로 불린 것에는 군사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물론, 이후에는 각 주별로 자사들이 죄다 지휘권을 가지게 되어 실질상 자사 직위는 유명무실해졌고 목으로 칭해졌다.



글의 품질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도해를 첨부하고 정리해보았다.


주자사 > 태수 = 상 > 현령( = 상)

주목 = 주자사 + 군권

국은 1개 군 또는 1개 현으로 이루어짐

태수 = 군 총괄 담당
도위 = 군의 군무 담당
승 = 군의 정무 담당

영 = 현 총괄 담당
위 = 현의 군무 담당
승 = 현의 정무 담당

※ 독우나 중위, 정장 같은 설명 안한 작위가 몇 있는데 글이 길어져 일단 제외하였다.
Posted by OOJJRS
,

중국과 유럽 간 무기 체계의 발전은 차이가 존재한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인 병사 개념의 차이가 가장 큰 것으로 생각된다.
(여차저차 하지만 역시 무기의 가장 큰 소요계층은 군대인 법이다)

군인이 하나의 직업이자 시민으로 구성된 그리스-로마 계열 군대에서 그들은 주력 전투원이었으며 존중받았다.
(용병을 사용했던 카르타고 등의 지중해 주변국도 결국은 "다른 나라의 시민"을 고용한 것이다)

존중받았다는 말의 의미는 적어도 중국에서 보병이 그러했던 것처럼 머릿수 채우기나 총알받이(총은 없었지만)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인구가 많았던 것도 있지만(대개 소외되는 사실이지만 한나라의 전 영토는 고대 로마의 최대 판도보다 넓었다)

병사가 징병으로 주로 이루어졌기에 농민군이 주축이었고 하나의 직업이라기보다 국방의 의무를 지는 형태였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중세에 봉건제가 되고 기사가 주전력이 되어 중국의 그것과 비슷한 전투 방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좀 더 보편적인 무기 외에는 생산되지 않았다. 대개 유럽에서 무기의 발전이라 하면 점차 대형화되어가는 추세에
 
각종 문화 차이에 따른 특수한 무기가 존재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반면 중국에서 대기병 전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전투는 대개 일기토전 또는 계략전이었고

일기토전 - 무술 싸움이란 완전 그들만의 잔치였기에 그들의 기호에 따라 여러 특수한 개량 무기들이 줄줄이 탄생했다.

얼마나 무기가 많았는지 이미 송 말에는 무관의 "기본" 덕목으로(과장이 심하다고 생각되지만) 17종의 무기를 완벽하게

익히는 것을 들고 있다.


한대에도 이미 무기는 굉장히 많았다. 다만 역사적으로 이야기가 계속 추가되어갔기에 당대에는 없었던 무기들이나

조상에 해당하는 무기들이 잘못 그려져 전달되는 것들이 많다(그게 아니라면 아직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리라).

예를 들면 극이란 무기는 원래 창과 비슷하나 부속 칼날이 달려 있어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기 좋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까지 들으면 여포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어보이지만 부속 칼날이 초승달 모양이 아니라 갈고리 모양이다.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무기편 두번째 시간에 혹시 그림이 추가된다면 그때 보시라)

초승달 모양의 부속 칼날은 송대 이후에 등장했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극 무기가 등장할 뿐 아니라 여포의 방천화극은 유명하다못해 상징물이 되었다.
 
극의 조상에 해당하는 무기가 있어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혼동이 일어났거나(아니면 송대에 만들어졌거나),

있었던 무기가 대기병 전술이 알려지기 전까지 활용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나 해야할 듯 하다.

연노를 발명했다는 제갈량의 결과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실제 있었는가의 여부에서부터

정말 10발씩 동시 발사가 되는가, 위력적이었는가 하는 등의 숱한 의문들을 안고 있다.

이런 삼국지 시대의 무기에 대해서 목록별로 알아볼 주제를 마련해보았다.


아무래도 그림이나 사진을 추가해야겠지만 특유의 귀차니즘으로 이번편까지 넘어갔다.

무기편 -2-에서부터는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을 첨부하겠다(언제 쓰여질지는?).

Posted by OOJJRS
,

조조 -1-

삼국지 2009. 9. 24. 16:14

저명한 중국 역사학자 10인이 만장일치로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동아시아의 최대 영웅으로 꼽았다는 조조.

그러나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실사구시에 입각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가장 많은 욕을 먹은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업적이 가려지고 왜곡되었다. 1950년대부터 꾸준히 복권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학계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에게는

여전히 악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는 또 역행이 지나쳐 조조 숭배자라고 불릴만한 이들은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고 있으니,

부뚜막에 왜 연기가 나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현재의 우리가 근 2천년 전의 이야기들을 세세하게 복원할 수는 없지만, 아마추어라는 이름을 방패삼아

상상력을 마구 동원하여 결과물들을 역추적하여 복원해가는 과정은 나름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가장 극적인 왜곡의 걸작 중 하나는 여백사와 진궁에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정사에는 여백사는 물론 진궁도 따로 열전이 없이 무제기(조조전), 여포전 등에 편린된 기록으로 나타날 뿐인데

연의에서는 제법 거하게 등장하여 한을 향한 충신으로 분류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보자.



1. 정사의 기록에서는 동탁이 실권을 잡은 뒤 조조가 귀향하는 장면에서 분명 중모현에서 붙들린 적이 있다.

2. 정장(=우리나라 개념으로 사또)이 조조를 의심하여 사로잡아 현성까지 압송했으나 조조를 알아본 이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3. 진궁의 효심이 깊다는 것은 정사의 기록에서 죽기 직전 노모를 조조에게 부탁하는 짤막한 대목이 나와 알 수 있다.

4. 장막은 원래 원소, 조조와 친분이 깊었으며 두 사람 모두 장막의 능력과 인품을 인정하고 교유한 친우 사이였다.

5. 여백사는 기록이 없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 시도하고 실패하여 도주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석연찮은 부분이 굉장히 많다.

우선 암살을 하는데 웬 보도가 필요하단 말인가? 당시 농민군은 무기와 갑주가 변변찮고 반란을 두려워한 지휘관에 의해

날카롭게 벼려지지 않은 무기들이 주어졌기에 그런 것들로는 당연히 사람을 일격에 죽이거나 할 수는 없었으나

장수급들은 달랐다. 그들은 당연히 전투를 지배해야하기에 늘상 무기에 신경쓰고 날카로움을 유지했다.

요약하자면 조조는 자신이 가진 무기만으로도 만약 하려고 했으면 큰 문제가 없었으며, 반드시 보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조조가 칼을 빼들고 다가가다가 거울에 반사된 빛 때문에 걸렸다고 한다. 개그였을까?)


게다가 연의에서는 조조가 동탁의 곁까지 칼을 차고 갈 수 있었다고 하지만 동탁이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사실로 받아들여야할지 의문스럽다. 칼을 차고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숨기기 좋은 단검을

선택해야 마땅했으리라.


정사에도 기록이 없고, 앞뒤도 잘 안맞는 이런 소설적 설정에 의거하여 암살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조조가 굳이 중모현에서 붙들릴 만한 짓은 하지 않았음에도 정장의 의심을 사 붙들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마 첩자나 범죄자(살인자, 산적 등)로 오인받은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1, 2번을 합하여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으니 누군가를 집어넣기엔 좋은 설정이다.



3번에서 우리는 민중의 공분이나 동감대 형성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나관중은 그간 널리 퍼져있던 삼국지의 이야기를 취사종합한 것이 대부분의 작업이었지만,

그의 시대에 씌여졌건 그 이전에 형성된 이야기건 충과 효는 늘 최대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효자를 충신으로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이 모든 조작에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4번과 조조의 인품이다.

장막은 조조가 기반이 잡히기 전에 이미 태수직에 있었고 조조가 힘들어할 때 옆에서 원조했으며 서주에서 도겸과

힘겨운 전투를 치를 때에도 그 후방을 맡아준 신의 넘치는 인물이다.

정사에서는 서주로 1차 출격했던 조조가 회군한 후 장막과 재회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까지 있다.

연주 지방의 실권을 잡고 있던 조조의 배후를 가장 넓게 맡아주고 있던 인물이 장막인데,

이런 인물이 단순히 원소, 조조, 장막 사이의 불화가 생긴 틈에 여포가 도착하고 진궁이 충동질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다.

연의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없이 장막의 인물됨이 축소되어 있어 지금 이러한 설명을 들은 직후에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음을 느낄 것이다.

결과는 이미 나와있듯, 조조 세력권의 대부분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장막이 일으킨 반란인 만큼 여포와 진궁이 지휘하지 않았어도

조조 세력권은 거덜났겠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려면, 뭔가 적당한 대의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장막 본인에게는 그럴듯한 이유 - 그러니까

"원래부터 신의가 떨어지는 인물이었다"는 식의 설정을 붙여줄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곳을 손봐야했던 게 아닐까.

관계된 자가 사악하여 내 손으로 치겠다는 식의 명분은 그럴듯하다. 반대편에 선 조조는 악역을 맡을 수밖에.

그래서 진궁은 정사에서의 첫 등장이 장막 휘하에서 식객으로 있다가 조조를 배신하는 장면이지만,

연의에서는 조금 땡겨진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충신' 진궁이 조조를 까려면, 깔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을 연의에서는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키는 것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이상한 점이 한두개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여백사가 존재했다고 가정해보자.

조조는 낙양의 변화를 감지하자마자 부친 조숭을 고향으로 내려보내고 나중에 연주에 기반을 잡은 뒤에도

다시 부친을 자신의 근거지로 옮겨오게 하며(서주에서 죽었지만) 어딘가를 원정할 때도 배후를 단단하게 하고 떠났다.

그런 그가 조숭과 각별한 사이라는 여백사를 그런 길목(?)에 내버려두었을까?

설령 조조가 챙기지 못해서 그 동네(?)에서 그대로 살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의심이 많은 조조였다면 차라리 아예 들르지 않고

피해가는 식으로 우환거리를 애초에 만들지 않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게다가 붙잡혔다 풀려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은가?)

일부러 여백사에게 들러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에 의심을 불러오게 하고 또 그것을 의심하고 참사를 일으켰다는

설명은 조조 같은 지략가에게 별로 어울리는 처신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그렇게 의심 많은 조조가 다음 마을에서는 쿨쿨 잘 잤다고 한다)

초기의 기록에서 조조는 호탕하고 자유분방하여 사람 사귀기를 즐겨했으며 온갖 망나니 짓을 하고 다녔다고 기록하는데,

정치판에서 점차 의심덩어리가 커져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종국에는 의심덩어리가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쳤으니 초반부터 그러지 않았겠느냐 라는 설정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 같다.





다음에 계속...

Posted by OOJJRS
,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척관법을 사용하는데 이에 따라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바로 알아야할 사실은 과거의 이런 단위들(비단 중국 뿐 아니라 서양의 큐빗, 피트, 야드 단위도)이

고정적인 표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개 이런 단위들의 기준은 왕의 그것에 맞추어졌으며 시대 상황이

요구하는 필요에 따라 수정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1feet는 발길이였으며 즉위한 왕의 발크기에 따라 정해졌고
 1yard는 팔을 쭉 펼쳐서 코끝부터 한팔의 끝(보통 오른손 중지)까지 잰 길이로 정해졌다.
 당연히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밖에?)



현재 공인(이 말은 어폐가 조금 있다)된 척관법에서 1척은 30.3cm지만 원래 1척의 정의는

한 뼘(엄지부터 중지까지 쫙 펼친) 길이였으며 과거에는 18cm 정도로 시작하였다.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후한 말기에는 23.5 ~ 24cm 가량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길이는 후대로 갈수록

길어져서 현재에 이르렀다.



1장은 또한 주 왕실 시절에는 8척을 한 단위로 하여 이루어졌지만
 
최소한 원말명초대에는 10척을 한 단위로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크나큰 시대적 간격이 있음을 양해해달라(아마추어라는 말로 변명을 삼겠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안타깝게도 시대상을 반영하는 정보들이 부족하여 당대의 생활을 알아보기 어려우나

후대에 씌여진 삼국지 주(배송지)나 삼국연의(나관중)에서 각종 무기들을 표현할 때 이를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장비의 장팔사모는 1장 8척으로 표현되며, 만약 1장이 8척으로 유지되었다면 2장으로 표현했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사에서는 이러한 언급이 거의 되어있지 않으며 관장마황조전에서도 물론 표기되어 있지 않다)


1치는 물론 1/10척으로 꾸준히 유지되어왔다.


이에 따라 이제 삼국지를 볼 때 영웅들의 신장을 오해하는 일은 없어지리라 본다.

조조가 7척이 못 되었다고 하는 키는 168cm가 안됐다는 소리고 유비가 7척 5치였다는 것은 180cm였다는 소리며

9척의 키는 211 ~ 216cm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서도 하나 더 생각해야할 것은, 이러한 기록들은 당대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거나 기록이 오래 남는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개 근사치라는 사실이다.
(일단 삼국지주가 쓰여진 송대만 하더라도 1척은 이미 후한 시대보다 많이 길어졌다)

9척의 키를 가졌다고 나오는 대개의 장수들은 꽤 덩치가 컸다고 이해하면 되며, 나머지 키의 경우도

눈대중으로 보아 대충 그 정도였겠거니 하고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어떤 경우에는 기록 상에 차이도 보여, 대충 정해둔 티가 나는 것들도 있다)




글을 다 쓰고 올린 지 하루가 되었는데 '근'에 대한 내용을 빼먹었더라.

다른 글에 포함하여 올리려고 하였으나 구상을 하는 도중 도저히 이 내용이 들어갈만한 분류가 보이지 않더라.

하여 수정한다.

1근에 대한 오해도 상당하여 요즘조차 1근을 고기 무게로 하여 600g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실제로

쇠 등의 금속에서 사용되는 1근은 400g을 기준으로 한다.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당연히 이 무게가

한대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근이라는 단위 또한 지속적으로 무거워져 왔으며 다른 도량형보다는

오랜 시간 크게 변하지 않은 편이기도 하다.
(금속이나 고기의 산출량이 갑자기 증대된 것은 역사상으로 보아도 근대의 일이다)

물론 별 의미는 없을 정도로 근대 이후에는 인플레이션을 갖고 왔지만...



후한 대에 1근의 무게는 대략 200g 내외, 250g은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요즘으로 미루어보아 고기 무게는 또한 별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치는 않다)

공식(?) 기록 상 가장 무거운 무게로 알려진 관우의 청룡언월도는 82근, 16.4 ~ 20.5 kg의 무게 정도였다고

생각하면 되리라. 물론 이 정도만 되어도 들고 휘두른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을 만큼으로 느껴지지만,

청룡도는 양손도검이며 중병기는 대개 도나 극의 형태를 띠지만, 이것은 무기 편에서 따로 자세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용할 수 있는 무기란 얘기...
Posted by OOJJRS
,